제15장
강태준은 핸드폰을 든 채 잠시 멍하니 굳었다.
“산부인과에는 왜 간 거야?”
전화를 건 상대는 앞서 강 비서의 명령을 받고, 대표가 사모님의 일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몰래 뒤를 쫓던 사람이었다.
강정우는 연애 상담을 해주다 깨달은 게 있었다. 제 상사는 그저 지독한 츤데레일 뿐이라는 것을. 이혼하기 싫어서 집을 나왔으면서 인정은 못 하고, 하루에도 팔백 번씩 사모님이 집에서 뭘 하는지 물어보는 꼴이라니.
보고하기 편하도록 사람을 붙여 사모님의 동향을 살피게 했는데, 경찰서 쪽에서 배치한 사람이 김지연이 진료실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 안의 상황은 알지 못했다. 전화 너머로 대표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느껴지자 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강 대표님, 혹시 사모님께서 임신하신 건 아닐까요?”
강태준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고는 강정우에게 돌아오는 비행기 표를 예매하라고 지시했다.
김지연이 본가에 돌아왔을 때, 강태준의 번쩍이는 벤틀리가 마당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김지연이 차를 세우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강태준이 거실 통창 앞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 곧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뒷모습에 석양이 금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몇 초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선 설레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마음속에 방어선을 치고 억지로 그를 내려놓으려 했건만, 고작 뒷모습 하나에 방어선이 무너질 뻔했다.
등 뒤의 시선을 느낀 강태준이 몸을 돌렸다. 그는 전화로 빠르게 몇 마디를 지시하고는 그녀를 끌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방 안의 커다란 침대 위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위의 금박 로고는 조금도 겸손하지 않았다. 요즘 가장 핫해서 일반인은 구하기조차 힘든 에르메스 한정판이었다.
김지연이 의아한 듯 그를 돌아보았다.
“신상 백이야. 지난번에 빚진 거.”
김지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지난번 함께 밤을 보냈을 때, 억지로 ‘여보’라고 부르게 했던 상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필요 없으니까, 윤진아 씨나 줘요.”
강태준은 그녀가 선물을 받으면 조금이라도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평소 온순하던 작은 양 같던 그녀가 대뜸 그의 속을 긁어댔다.
“갖기 싫으면 버려. 진아는 가방 부족하지 않아.”
김지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겠죠. 강 대표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분인데 가방이 부족할 리가요.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달라고 하면 강 대표님이 직접 따다 주실 텐데요.”
김지연이 꼬박꼬박 ‘강 대표님’이라고 부르자 강태준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강태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곁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거의 맞닿았고, 그는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네 남편이야!”
그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지연은 잔뜩 찌푸려진 그의 미간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통쾌함이 차올랐다.
“미래의 제부, 우리 이혼은 언제 해줄 거예요? 더는 당신이랑 연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강태준의 역린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그를 격분시켜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빨리 찍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놓아주고는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이었다.
“기자회견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잖아.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강씨 그룹을 주시하는지 알아? 할아버님께서 너한테 어떻게 하셨는지 잊었어? 그렇게 서둘러서 네 민준이한테 가고 싶은 거야?”
경쟁사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붙여 그를 감시하고 있는지 몰랐다. 강씨 그룹 대표의 이혼 소식이 퍼지기라도 하면, 분명 온갖 살이 붙어 부풀려지고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회사 주가가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다음 분기 신제품까지 영향을 받을 게 뻔했다. 그건 팀 전체가 한 분기 내내 고생해서 이룬 결과였다.
그가 할아버님을 들먹이자 김지연의 마음이 살짝 약해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양보했다.
“그럼 각방 써요.”
강태준의 머릿속에 부하 직원이 전화로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미간이 움찔 떨렸다.
“너 임신했어?”
김지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닌데요?”
“그럼 산부인과에는 왜 갔는데?”
김지연은 그가 자신을 뒷조사했다는 걸 깨달았다.
“유수빈한테 물건 갖다주러요!”
그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전 객실에서 잘 거예요!”
강태준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앞뒤 구분도 안 가는 네 몸으로 날 막겠다고? 빨래판에 못 박아 놓은 꼴이면서.”
그는 비웃는 말을 남기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김지연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개자식!
나 B컵이거든?
어떻게 빨래판에 못 박은 게 되냐고!
“당신은 대들보에 고추 매달아 놓은 꼴이거든요.”
김지연은 그가 듣든 말든 문을 향해 쏘아붙였다.
그날 밤 강태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김지연은 낯선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옥룡만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입니다. 혹시 옥룡만 14동 7층 1301호 소유주이신 김지연 씨 맞으십니까?”
김지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옥룡만. 결혼할 때 할아버님께서 사주신 고급 아파트로, 지금은 윤진아가 살고 있었다. 관리사무소에 연락처를 남길 때 김지연의 번호를 적었던 모양이다. 강태준은 귀찮은 걸 싫어해서 자기 개인 번호를 남길 리가 없었다.
“네, 맞는데요. 무슨 일이시죠?”
관리사무소 직원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아래층 입주민께서 댁에서 밤에 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 휴식에 방해가 된다고 민원을 넣으셨습니다. 다들 성인이니,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이해하시겠죠? 앞으로는 남편분과 조금 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로 배려하며 살아야죠.”
김지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전생에 강태준네 조상 묘라도 파헤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생에서 이런 취급을 받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젯밤 옥룡만에 갔던 것이다.
그는 윤진아와 관계를 가졌다.
그 고급 아파트는 방음이 아주 잘 될 텐데, 얼마나 요란하게 했으면 아래층에서 민원이 들어올까?
정말이지 참을성도 없지. 이혼할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윤진아가 임신까지 했는데도 그렇게 불같이 사랑을 나누다니. 배 속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되지도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이 메슥거렸다. 아마 입덧이 또 시작된 모양이었다.
김지연은 화장실에서 한참을 토하고 나온 뒤 강태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옥룡만 아파트, 내 명의 좀 빼주면 안 돼요?】
그녀는 더 이상 이 빌어먹을 집주인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안에서는 그의 애인을 키우고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이웃에게 민원을 받으며 그 쌍놈들의 불륜을 강제로 목격해야 하다니.
강태준이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는 마침 강 비서에게 업무 보고를 받고 있었다.
“강 대표님, 그날 밤 사모님을 덮쳤던 강도들이 풀려났습니다. 총 세 명인데, 저희 쪽 사람들이 잡아두었습니다. 직접 가보시겠습니까?”
“가지.”
강태준이 험악한 얼굴로 대답했다. 감히 강씨 집안 사모님을 건드린 놈들이 대체 어떤 놈들인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 세 명의 강도가 폐 드럼통에 묶여 있었다. 입이 틀어막힌 채 으으, 끙끙대는 신음만 새어 나왔다.
강태준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빛을 등진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워졌다. 마치 사형을 선고하러 온 염라대왕 같았다.
들어온 사람의 기세가 워낙 엄청나서, 세 강도는 겁에 질려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우두머리가 누구야?”
경호원이 강도 중 한 명을 가리켰다. “강 대표님, 이 서준이라는 놈이 세 명 중 두목입니다.”
“입 풀어줘.”
강태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경호원은 즉시 서준의 입에 물린 더러운 양말을 빼서 던져버리고는, 더럽다는 듯 자기 허벅지에 손을 쓱쓱 문질렀다.
서준이 헛구역질을 몇 번 했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했다.
강태준이 긴 다리를 뻗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손발이 묶인 서준은 완전히 인간 샌드백 신세였다. 강태준에게 걷어차여 바닥에 쓰러지며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비명을 지른 후, 강태준의 싸늘한 얼굴을 힐끗 보고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누가 시켰어?”
서준이 입을 굳게 다물고 말했다. “아무도 안 시켰습니다. 제가 여자를 보고 혹해서….”
그가 ‘여자를 보고 혹했다’는 말은 강태준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감히 네까짓 게 뭔데 강씨 집안 사모님을 넘봐?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강태준이 다가가 다시 한번 거세게 발길질했다. 남자의 급소를 정확히 걷어찬 발길질에 창고 안에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른 두 강도는 겁에 질려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네까짓 게 감히? 누가 시켰는지 불어, 안 불어?”
서준은 바닥에서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 한 방에 아마 남성 구실을 못 하게 된 듯했다.
강 비서가 다가와 조언했다.
“강 대표님, 이 서준이라는 놈,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힌 것 같습니다.”
강태준이 남은 두 명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두 강도는 즉시 끙끙거리며 할 말이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강 비서가 그중 한 명의 입에 물린 것을 빼냈다. 남성용 팬티였다. 그는 질색하며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경호원을 쏘아보았다.
입이 풀린 강도는 울고불고하며 자백했다.
“말할게요, 말할게요! 제가 그 여자 봤어요! 때리지 마세요, 저희 집 삼대독자예요. 아직 장가도 못 갔고, 아들도 못 낳았단 말이에요….”
